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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우 개인展
날짜 : 2014.10.30 ~ 2014.11.05
장소 : 이공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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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처 : 042.24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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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이만우 개인展

전시기간 : 2014.10.30 ~ 2014.11.05

전시장소 : 이공갤러리

관람시간 :

관 람 료

문 의 처 :  042.242.2020




이만우의 그림과 그림 그리기

 

화가 이만우가 오랜 시간을 두고 붙들고 있는 소재는 논바닥이다. 제법 긴 시간 그의 그림을 보아온 나도 그렇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떠올릴 것이다. 추수가 끝나서 벼의 밑동만 남은 질퍽한 논바닥이 농기계 바퀴로 패이기도 하고 밀려 오르기도 한, 보는 이로 하여금 쓸쓸함이나 덧없음을 먼저 떠오르게 할 법한 그 소소한 퇴락의 한 귀퉁이를 그는 무진히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기억력 좋던 초등학교 시절 무턱대고 외워야 했던 덕에 전 국민의 ‘기초상식’ 쯤은 될 구석기시대 유적지 ‘공주군 석장리’ 언저리, 공주와 대전을 잇는 금강 변 옛길 고개 너머에서 어린 시절 을 보낸 그에게 논은 차츰 세상을 이해해 가는 매개가 되었던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기억의 자취들이 결코 ‘아름다운’ 것만으로 쌓이지는 않았으리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논바닥을 그의 그림 ‘소재’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저 소재라고 만은 할 수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그는 천상 ‘붓질을 하는 화가’라고 해야 할 듯한데, 그러한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칠하는 것(회화)란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내는 것인가에 대한 배움과 익힘을 스스로 구체화하고 자기화하는 길을 찾은 곳이 바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맺힌 논바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 한구석의 모습은 마치 하늘 높이에서 땅과 물이 어우러진 대자연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확대된 마이크로의 세계에서 거대한 자연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그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의 시각이 포착하는 이미지에 관한 문제가 되고, 나아가 회화에서의 이미지의 문제 그리고 그린다는 것, 재현 등과 같은 회화의 몇몇 본질적인 물음과 잇닿게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회화의 본질에 관해 물음을 제기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방식을 자신의 화가로서의 길로, 그리고 자신 작업의 방식으로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수하고 투박하면서도 기질적으로 꼼꼼함과 끈기를 가진 그는, 걷이가 끝난 물 빠진 논을 세밀한 필치로 매우 사실적으로, 때로는 극사실에 가깝게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리가 내리거나 물이끼가 자라기도 하고, 바퀴로 웅덩이 진 곳에 고인 물에 비친 하늘과 구름 그리고 돋아 올라 마른 흙과 벼줄기가 대비되는 논바닥을 거대한 대지의 풍경처럼 보이도록 하는 방식을 때로는 한 화면에 때로는 각기 다른 그림에서 병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림들은 마치 네가 보는 것이 과연 작은 논바닥 한 귀퉁이인지, 아니면 피요르드 협곡이나 툰드라 지역 어느 한 곳인지 네 눈을 의심하고 확인하라는 듯이 보인다. 아니면 화면에 재현된 그 둘 간의 차이란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 듯하기도 하다. 인간이 가진 감각(시각)의 불완전함이나 해석의 주관성을 드러내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한 사실에 기인하는 다중성 또는 다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간 개인전 도록들에 간간이 적힌 작업노트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자신의 이미지(화면)가 만들어지는 데 소요되는 노동에 대해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작업이 그저 다중적 성격을 가진 이미지의 가벼운 유희에 머물지 않기를 원하는 그의 진지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터무니없을 수도 있지만 이 대목에서, 그의 작업으로부터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현대적 논의보다는 우의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담은 근대 이전 북유럽 회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농부의 노동처럼 정교한 짜임과 성실한 태도를 바탕으로 하면서 중의적, 또는 다중적 속성을 가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그간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작은 전자부품이나 잘라낸 회로기판을 예의 화면에 붙이는 변화를 모색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의성 다분한 보도사진들을 차용하여 ‘여전한’ 태도로 ‘이미지의 전이’에 관심을 둔 듯 재구성하기도 해온 그이다. 그 가운데 시의성 있는 소재들은 그의 오랜 소재인 농토라는 단어가 환기하듯 진실함 혹은 도덕적임이라는 가치를 배경에 두고 있는 바 그러하지 못한 부조리에 대한 항의를 담고 있는데, 이는 반대로 자신의 작업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을 차마 그리지 못하는 그의 성정을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한 탓인지 그는 이러저러한 여러 시도들 끝에 다시 논바닥으로 돌아오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었다.


근자에 그는 오랫동안 지속해온 자신의 작업방식, 그러니까 다중적인 이미지가 자신의 그림에서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반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적인 그림이란 결국 눈속임(trompe l‘œil)에 불과한 허상이다. 극사실적 회화(hyper-realism)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혹은 저것으로도 볼 수 있는 사실적인 표현의 다중적 이미지는 이들 둘의 교훈을 재차 강조하면서도, 이들처럼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며 화가의 의도가 담긴 지적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에셔(Escher)의 그림처럼.이만우의 그림 또한 이처럼 가상과 현실을 이차원의 화면 속에서 넘나들고자 하는 욕구가 만들어낸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한데 그에게는 ‘그린다는 것’ ‘노동으로서의 그리기’라는 또 다른 욕구와 목표가 존재하면서 내부에서 각축함으로써, 자신의 그림을 어느 한 방향으로 온전히 몰고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반성의 핵심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업실 주변의 이러저런 풍경과 소재를 놓고 ‘그리기’를 다시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떠한 궤적을 그려 정착된 모습을 보여줄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후에 그 실마리였음을 확인하게 해줄 그림들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리기의 미덕이나 가치가 터무니없이 도외시되는 지금, 불혹을 넘어 지명으로 다가가는 글머리쯤에서 이야기했던 바 천상 붓질을 하는 한 화가의 ‘진술’이기도 하다.

 

박정구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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