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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지대, 실재와 허상사이展
유형 : 대전전시회
날짜 : 2016.03.10~03.23
시간 : 11:00~19:00
장소 : 이공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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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처 : 042-24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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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중성지대, 실재와 허상사이展 

장르 : 대전전시회 

기간 : 2016년 3월 10일~3월 23일 

장소 : 이공갤러리 

관람시간 : 11:00~19:00 

관람료 : 무료 

문의처 : 이공갤러리 042-242-2020 

전시오픈 : 2016년 1월 21일 오후 3시 



 




이공갤러리가 3월을 맞아 개최하는 기획전은 '중성지대-실재와 허상사이' 展이다.

9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전시는 참여작가의 연고에 연연하지 않고 대전지역 작가뿐아니라 중앙 화단에서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중 미술적 발언이 기획정신에 부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들이 선정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섭외, 선정은 전적으로 본 전시 기획자인 서용인이 진행하였으며 그는 다음과 같은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다.   


‘실재와 허상’이란 주제는 철학적, 미학적으로 오랜 시간 다루어져온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주제에 대한 접근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전시는 ‘실재와 허상’이란 주제를 통해 그 주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하는 시간을 갖고, 또한 전시되는 작품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는 기회를 갖고자 기획되었다. - 부분 발췌-





중성지대- 실재(實在)와 허상(虛像)사이


‘실재와 허상’이란 주제는 철학적, 미학적으로 오랜 시간 다루어져온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주제에 대한 접근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전시는 ‘실재와 허상’이란 주제를 통해 그 주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유하는 시간을 갖고, 또한 전시되는 작품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는 기회를 갖고자 기획되었다. 

주제에 대한 사유의 범위가 광범위한 관계로 기획자는 그 범위를 철학적으로는 석가모니, 플라톤, 구조주의, 질 들뢰즈 그리고 미학적, 미술사적으로는 구조주의의 상징주의와 질 들뢰즈의 사건과 연결 지은 콜라주 형식에 제한하여 논하였다. 


우리는 신체와 정신이라는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신체를 이루는 다양한 감각들을 통해 외부의 현실존재와 관계하고, 정신은 그 관계로 발생하는 경험과 그 기억들을 통해 상상을 펼친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로 인해 우리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서 그것을 구분하거나 그 두 측면의 마주침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석가모니(釋迦牟尼 BC 624?~544?)는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허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있는 상태를 실재라고 보았다. 즉 석가모니에게 삶이란 실재와 허상 사이에 요동치는 물의 표면과 같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실재와 허상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마음을 통해 그러한 요동침을 조절하는 것을 허상(집착)에서 벗어나는 길로 보았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에게 허상은 신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신체로부터 멀어질 수 록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정신(이데아)이라고 말한다. 허상은 언제나 눈앞에 보이는 것, 신체로부터 발생되는 것들이자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을 어지럽히는 불안정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스스로부터 스스로 규정되고 명령되는 것을 완전한 실재라고 보았다.

석가모니가 허상 속에서 실재를 접근했다면 플라톤은 허상 밖의 실재를 사유한다. 석가모니에게 흐르는 물 그 자체는 허상이며 그 물의 요동침을 조절하는 것이 실재로서, 즉 스스로의 마음 상태인데 반해 플라톤에게 흐르는 물은 신체와 연관된 허상이며 실재는 정신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실재와 허상사이에서 자기 존재의 실존적의미를 사유하지만 플라톤은 오직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정신)를 통해서만 존재론적 의미를 사유한다.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플라톤의 사상과 연결된다. 구조주의자들은 현실적인 것 너머에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상징적 체계가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이 상징적 체계를 정신이라는 관념 속에서 사유한 반면 구조주의는 우주 그 자체를 통해 보려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이 우주는 카드놀이로 비유될 수 있는데 여기서 카드놀이는 구조 그 자체이며 카드놀이의 진행은 구조의 작동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카드놀이 그 자체는 무의미이며 카드놀이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상징이 의미로 현실화 되는 것이다. 즉 무의미는 일차적인 상징적 점유이자 주체의 동일성이 부정된 무 인격적 주체이며 의미는 현실적 존재들에 의한 이차적 점유이자 인격적 주체를 의미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심층에 흐르는 실재로서의 상징적인 것을 현실적이고 상상적인 것들인 허상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현실적이고 상상적인 것들을 상징적인 것으로 옮겨놓으려 시도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실재와 허상을 ‘사건-효과’를 통해 사유한다. 들뢰즈에게 실재와 허상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에겐 오직 ‘사건-효과’만이 존재할 뿐이며 그러한 실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에게 실재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효과’가 형성하는 무엇이며 ‘사건-효과’ 그 자체이다. 그런 이유로 구조주의의 실재는 변하지 않지만 들뢰즈의 구조(실재)는 ‘사건-효과’와 함께 변화한다. 

들뢰즈에게 실재는 두 개의 사건, 즉 순수사건과 효과로서의 사건으로 구별될 수 있다. 순수사건이 전체를 통해 해석된 사건 보기라면 효과로서의 사건은 부분을 통해 해석된 사건 보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순수사건이 탈 주체적 구조라면 효과로서의 사건은 주체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사건은 언제나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성질을 동시에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신체와 정신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효과로써의 사건이 계열을 이루면서 순수사건이 형성되고 효과로써의 사건의 진행 속에서 순수사건은 변화한다. 이러한 구조를 그는 리좀(rhizome)구조라고 한다. 리좀은 줄기식물의 뿌리를 의미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줄기들이 서로 접속되어 형성하는 탈 중심의 계열들을 그리고 뿌리가 흙의 표면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내재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예술가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친 사유는 아마도 구조주의와 들뢰즈의 사건개념일 것이다. 구조주의의 상징개념은 겉으로 노출되지 않는 인간의 내면심리를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표현하는 효과적인방법이다. 즉 표면적으로 이루어진 사물들을 통해 심층에 흐르는 구조적 의미로서의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그리고 작품에 흐르는 멜랑꼴리melancholy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구조적 의미를 논할 때 자주 낭만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작품형식을 가져오는데 이러한 작품형식에서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떤 심리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 형식들이 갖는 작업의 두드러진 특징은 표면을 유동하는 사물들이 아니라 저편에 흐르는 운명적인 어떤 분위기나 기분과 같은 상징적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작품을 현실적이지 않는 어떤 무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또한 구조주의가 현상 너머의 실재하는 본질을 보려 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미적 개념과 연결해 볼 수 있다. “몬드리안의 임무는 예술의 개별성의 기반이 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에 의한 채색면들의 파괴, 반복에 의한 선들의 파괴, 회화적 표면의 조각적 구성에 의한 광학적 깊이의 환영을 파괴한다고 한다."(이브-알랭부아 Yve-Alain Bois) 이브 알랭부아가 쓴 몬드리안에 대한 글에서 우리는 구조주의의 상징을 볼 수 있다. 개별성의 기반을 파괴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개별성 너머의 본질을 상징한다. 

들뢰즈의 사건개념은 콜라주 기법과 연결 지을 수 있다. 콜라주 기법은 20세기 초 등장 이래 지금까지 모든 영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형식 중 하나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점은 그것이 서로 다른 시, 공간의 이미지들을 분리하여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콜라주 기법에서 중요한 것은 시, 공간 속의 이미지나 관념상을 물질적 대상으로 인식하게 유도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우리는 작품에서 이미지나 관념상들을 물질적, 표면적 대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콜라주 기법은 이미지를 특정 공간에 저장하는 디지털 방식 보다는 물질표면에 직접 새기는 아날로그 방식에서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회화나 판화, 필름을 사용하는 사진작업에서 효과적이다. 들뢰즈의 사건-효과는 하나하나의 조각난 이미지와 연결되며 그러한 사건으로서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의미를 형성 시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실재와 허상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이들에게서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접근하고자 한 것이 실재와 허상의 구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매개적 관계로부터 의미가 어떻게 발생되는가를 사유하려 한다는 점이다.

의미의 발생을 일으키는 이러한 관계에서의 의미발생은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의미부여에 다다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구조주의자들이 사유하는 구조, 즉 게임 속에서 그리고 게임의 진행과정에서의 주사위 던지기에 비유될 수 있다. 관계는 일종의 게임이며 게임의 진행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변적 마주침은 의미의 발생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만든 특수한 게임의 구조 속에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며 삶을 의미화 한다. 실재와 허상은 작가들이 이러한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한 또는 구조를 형성하기위한 일종의 장치이다. 즉 예술은 의미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를 형성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형성된 구조를 작동시킴으로서 그 속에서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어떤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외적요소들 사이의 작용을 의미할 것이다. 의미의 발생이 그러하듯 의미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의미는 정의와 닮아있다.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정의란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서로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생하는 숭고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숭고한 감정은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소속감에서 나오며 이 소속감은 개인의 자율의지를 초월하여 그 위에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기대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의미는 대부분 이러한 숭고한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나 관람자가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숭고한 감정일 것이다.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실재와 허상, 형식과 개념의 구분보다 그것을 통해 의미가 어떻게 발생되고 있는 가, 즉 중요한 것은 어떤 실재와 허상사이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이러한 의미부여를 위해 기획된 설치미술과 같다. 

“설치미술에 참여하도록 요청되는 것은 감각과 시각 그리고 청각, 촉감, 때로는 후각을 통한 바로 그 온전한 그대로의 신체이다. 그러한 설치미술의 작가들은 마치 이미지들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물들과 소통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 같다. (...) 우리가 추상들, 형태들, 색깔들, 부피들, 감각들을 통해서 어떤 실재적 경험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이번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작품 속에 작가들이 부여한 의미와 마주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실재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 서용인(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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