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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주영] 캐릭터 사랑하기, 연극에서의 일루션(Illusion) : [오셀로]
작성자 대전공연전시 (ip:)
  • 작성일 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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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39
평점 5점


캐릭터 사랑하기, 연극에서의 일루션(Illusion) :[오셀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기념연극/ 대전예술의전당 기획공연)


∙2016년 9월 23일(금) ~ 10월 1일(토)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원 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Shakespeare, William

∙번 역 : 신주훈 ▪ 각 색 : 오세혁 ▪ 연 출 : 박정희


홍주영(목원대학교 TV·영화학부)




Ⅰ. 들어가는 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연극, 영화, 뮤지컬, TV 드라마, 오페라 등등)는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태어난 적도, 살아본 적도, 죽어본 적도 없는 말 그대로 가상의 인물 즉, 대본 속에서나 그 윤곽을 희미하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존재들에 매혹당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나와 동일시하거나, 때론 목숨 다해 사랑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관객은 공연이나 영화를 보면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인물들은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살인을 하고, 때론 무고한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적에게 살해당한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안고 울부짖는 주인공을 보며 관객은 함께 울며 분노한다. 동시에 그런 일을 당한 인물에게 동정심을 갖기도 하고, 나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하고, 나에게 일어나면 어떡할까 걱정을 하기도 한다. // 주석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 9, 13, 14장 참조. //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들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갈 때, 또는 보는 도중 극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현실에서 그 일을 겪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극적 환상(Dramatic Illusion)의 오래된 논의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Ⅱ. 연극에서의 일루전 // 주석 : 이 부분은 본인의 논문 [연극에서의 일루전과 관객의 역할](연극교육학연구 제23호, 2013) 중 일부분을 요약, 정리한 것임. //



일루전의 개념


리얼리티(Reality)와 일루전의 경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리얼리티와 일루전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리얼리티는 절대 일루전이 아니며, 일루전은 리얼리티와 전혀 다른 것으로 서로가 정 반대에 위치한 개념들" // 주석 :  Kentaro Ichihara, Between Reality and Illusion, 2010. http://www.guggenheim.org/new-york/interact/participateyoutuge-play/ /the-take/moving-images/3735-between-reality-and-illusion // 이라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써 리얼리티는 "실재 존재하는 사물들의 상태" // 주석 : http://en.wikipedia.org/wiki/Reality // 이다. 반면에 일루전은 "어떤 사실을 실재와 다르게 지각하는 감각의 왜곡" // 주석 : http://en.wikipedia.org/wiki/Illusion // 으로 정의된다. 일루전의 어원은 라틴어 ‘Illudere’이며 ‘속이다, 가장하다’ // 주석 : 한국 문학 평론가 협회, [문학 비평 용어 사전](국학자료원, 2006). 75쪽. // 를 의미한다.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 또한 그의 저서 [예술과 환영] // 주석 : Ernst Gombrich(차미례 역),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서울: 열화당, 2003). // 에서 일루전을 "현상이나 진리 또는 법칙과는 반대로 감각의 기만이나 사기 이미지 또는 공상"이라고 정의했다. 일루전은 시각적으로 형태나, 색채, 길이, 거리, 움직임 등에서 일어나는 바르지 못한 지각으로, 물리적 측정과 일치하지 않는 시각․지각 현상을 말하며 시신경을 자극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하여 시각전달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 // 주석 : Ernst Gombrich, 같은 책, 30쪽. // 되고 있다. 즉, 일루전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시각․지각 현상으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거나 주위를 환기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리얼리티와 일루전


일루전은 "참고하는 세계에 대한 예술적 창작물 즉, 픽션(fiction)을 우리가 실재(real)와 진실(true)로 받아들일 때 연극에서 발생" // 주석 : Patrice Paves, [Dictionary of the Theatre](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8), 178쪽. // 한다. 또한 일루전은 "표현이 진실 되고 실재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리고 수용자가 그 표현에 동일하게 반응할 때 일어나는 미학적 경험" // 주석 : Dennis Kennedy, [The Oxford Encyclopedia of Theatre and Performance](V2.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17쪽. // 이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과 예술 작품으로 표현된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일체감을 수용자가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일루전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창작자의 일방적인 제시가 아니라 수용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며, 동시에‘자신들에게 제시된 것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인 것이고, 수용자가 그것을 낯설게 받아들일 경우 연극에서 일루전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무대 위에 제공되는 연극적 요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 그대로일 수는 없다. 특히 관객은 "각기 객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존재" // 주석 : 이근삼, [연극 개론: 그 이론과 실제](대학 사상사, 1995), 231쪽. // 이고, "사회적 배경, 가정환경, 교육 정도 그리고 개성이 각기 다른 존재" // 주석 : 이근삼, 같은 책, 232쪽. // 이기 때문에 관객 집단 전원에게 통할 수 있는 보편성 즉, 관객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유사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런 맥락 하에서 리얼리티와 일루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리얼리티의 강화는 일루전의 강화로 귀결되고, 더구나 관객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연극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마치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리얼리티와 일루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 즉 리얼리티의 일루전으로 묶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일루전은 불신을 기꺼이 멈추는 것(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 주석 : Frederik Burwick, 같은 책, 194쪽. // 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무대 위에 사실성을 극대화시켜 극적 일루전을 창출해 내려는 창작자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극적 일루전을 인정하는 수용자의 합의가 일루전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극적 일루전은 공연의 궁극적 목적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극적 일루전을 심어줄 때 공연의 궁극적인 목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적 일루전은 사실주의 연극의 전유물인 것인가? 사실주의 연극 전통에 반대하는 반사실주의 연극에서의 리얼리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표현주의 작가들은 유일한 리얼리티는 내적 리얼리티(inner reality)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리얼리티의 가면(mask of reality)이라고 주장" // 주석 : Richard D. Podahl, 같은 책, 2쪽. // 한다. 또한 "상징주의 연극의 배경은 종종 몽상의 세계" // 주석 : Edwin Wilson & Alvin Coldfarb, 같은 책, 518쪽. // 이었으며,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k, 1862~1949)는 "궁극적인 현실(reality)은 우리의 오관으로 파악될 수 없다고 단언" // 주석 : 이근삼, [서양 연극사](탐구당, 1990), 267쪽. // 했다. 초현실주의의 경우 "이성과 감정에 의해 때 묻지 않은 새로운 시를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 // 주석 : 이근삼, 같은 책, 293쪽. // 했으며, 앙드레 부르통(André Breton, 1896~966)은 "예술 작품이란 내적인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어야 한다고 주장" // 주석 : John L. Styan, [Symbolism, Surrealism and the Absurd], 원재길 역,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부조리 연극](예하, 1992), 69쪽. // 했다.


반사실주의 연극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비가시적 세계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 이들은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와 융(Carl Jung, 1875~1961)의 연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연구로부터 "시간, 공간, 허구적 내러티브(fictional narrative)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내적 리얼리티(inner reality)를 진실로써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고" // 주석 : Richard D. Podahl, 같은 책, 2쪽. // 우리가 실제 눈으로 또는 다른 감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물리적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 또한 존재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제 존재(real existence)’라는 의미의 리얼리티가 여전히 그 의미를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리얼리티와 일루전은 분리할 수 없다.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면 일루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사실주의 연극에서도 일루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길먼(Richard Gilman, 1923~2006)의 정의에 의하면 일루전은 "리얼리티의 불충분함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 // 주석 : 윤광진, [연극 일루전 고찰-거리감 작용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0, 10쪽. // 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의는 일루전이 단지 수용자의 인식에만 작용을 미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예술가들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도 일루전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루전을 통해 리얼리티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게 되고, 이 때 느낀 이미지가 작품 속에 구체화될 때 같은 일루전이 함께 부여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주의와 사조는 서로 다른 일루전을 갖고 리얼리티의 다른 축면을 조망한 결과인 것이다. 극작가가 갖는 일루전은 작품에 따라서 작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연극사의 넓은 테두리 안에서 본다면 같은 시대의 극작가들이 형성한 일루전은 공통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 주석 : 윤광진, 같은 논문, 12쪽. //


즉, 리얼리티와 일루전은 사실주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예술 창작자와 수용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리얼리티와 일루전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이 창작자의 손길을 거쳐 수용자에게 전달되며, 수용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예술에서의 일루전은 완성되는 것이다.




일루전과 관객의 역할


관객은 왜 일루전을 완성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배움의 즐거움’ // 주석 : Aristotle, 같은 책, 55쪽. // 에 대해 언급했다. 때문에 마몽텔(Jean-François Marmontel, 1723~1799)도 "드라마의 목적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고, 우리는 드라마가 제공하는 즐거움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일루전에 빠진다." // 주석 : Frederik Burwick, 같은 책, 2쪽. // 라고 했다. 프로이드 또한 "일루전에 대한 추구가 즐거움의 추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 주석 : Patrice Pavis, 같은 책, 179쪽. // 을 증명했다. 즉, 관객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제공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일루전의 완성과 함께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능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관객과 일루전의 관계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관객의 믿음(belief)이다. 프로이드는 일루전을 믿음으로 설명했다. 믿음은 주로 바람(wish)에 기원을 두고 있고, 바람의 강도를 통해 마음속에 유지된다는 것이다. 바람은 의식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바람은 주관적 왜곡을 리얼리티에 가미할 수 있는 것 // 주석 : Morris Lazerowitz, [Philosophy and Illusion](George Allen & Unwin LTD, 1968), 100쪽. // 즉, 일루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곰브리치 또한 프로이드의 연장선에서 "기대가 환영(illusion)을 창조해냈다." // 주석 : Ernst Gombrich, 같은 책, 201쪽. // 고 했으며, "마음이 온통 그것에 기울어져 있기만 하다면, 아주 사소한 자극만으로도 환영이 창조될 것" // 주석 : Ernst Gombrich, 같은 책, 218쪽. // 이라 이야기한다. 또한 관객은 오히려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일루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일루전을 창조하는 존재인 것이며, "관객의 믿음이 부재할 때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짜’의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 관객은 연극을 생성하는 언어" // 주석 : 안치운, 같은 논문, 8쪽. // 라고 할 수 있다.


일루전이 일어나는 것은 예술적 의사소통의 두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하나는 작품 자체의 성격으로서, 수용자들이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작품에 호응하여 스스로 리얼리티를 구성해내는 수용자 자신의 능력이다." // 주석 : 한국 문학 평론가 협회, 같은 책, 1164~1165쪽. // 즉, 일루전의 완성은 수용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때문에 관객의 역할은 더 이상 재현된 것이나 리얼리티를 인식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더 이상 재현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 해석의 과정을 통해 정의 // 주석 : Erika Fisher-Lichte, [The Show and the Gaze of Theatre](University of Iowa Press, 1997), 70쪽. // 된다.


즉, 연극적 사건의 ‘참여’라는 개념은 ‘적극적인 의미의 창조’를 의미하며, 관객은 연극 창작자들에게 자신의 연극 이념을 완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 파트너인 것이다. 특히,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관객은 ‘배움의 즐거움’과 ‘바람’을 통해 일루전의 창조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연에서 제시된 ‘의미 체계에 동의함’으로써 일루전을 완성하는 능동적 존재이다. 즉, 관객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리얼리티의 모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극단적 분열을 무효화시키고, 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형식을 발전" // 주석 : Erika Fisher-Lichte, 같은 책, 115쪽. // 시키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관객의 또 다른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캐릭터와 일루전


캐릭터는 대본 속에만 존재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캐릭터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즉,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다. 이것은 공연 대본을 읽을 때에도 공연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공연이나 영화를 볼 때 그 역할을 맡은 배우는 배우일 뿐이지 우리가 사랑하는 캐릭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우리는 배우가 아닌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힘은 극적 환상에서 비롯된다. 실재가 아님을 분명히 알지만 그것이 실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과 관객 본인이 가진 능력의 결합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캐릭터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했던 많은 내용 중 가장 핵심은 연극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본질을 ‘행동하는 인간(men in action)의 모방’  // 주석 : Aristotle, [Poetics], trans. Francis Fergusson, Hill and Wang, 1961, 52쪽. // 에서 찾은 것이다. 여기에서 모방(mimesis)은 단순한 협의의 복사(copying)를 의미하지 않고, 행동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으로써, 예술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의 대상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때문에 연극이나 영화 같은 드라마를 볼 때 등장인물들이 하는 행동을 통해 작품의 주된 내용과 인물을 이해한다. 행동이란 그들이 외적으로 표현하는 단순한 어떤 행위들을 의미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단순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행위가 아니고, 등장인물이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며, 어떤 몸짓이나 지문상의 어떤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은 그들이 그런 일을 왜 하는 지(또는 왜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어떤 동기, 목적, 의도, 욕구, 필요 등을 의미한다. 때문에 극적 행동이 없는 공연들이나, 원작에 존재하는 극적 행동들을 공연 작품에서 재현하지 못하는 공연들을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때문에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는 "지식은 행동으로부터 온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좋은 작품들은 ‘주요 인물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가’하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질문을 갖고 있으며, 이 질문이 관객의 관심을 계속 유지시키고, 이 질문을 중심으로 인물의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판단 요인은 ‘하마르티아(Hamartia)’이다. 이것은 비극적 고통을 초래하는 과오 // 주석 : https://en.wikipedia.org/wiki/Hamartia // 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이다. 하지만 인물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는 뒤에 그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면, 우리는 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단죄되어야 할 악행이라기보다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범할 수 있는 과오나 실수를 의미한다. 원래 하마르티아란 창을 던질 때 표적을 빗 맞추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최선을 다해 올바른 표적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쓰지만 우리의 의도와 노력이 언제나 우리가 수행한 결과와 합치하지 않는다. 즉, 의도와 결과의 빗나감을 말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을 치명적인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삶에 내재한 본질적 불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고 아무 의심 없이 살아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핵심 요인은 바로 인물의 ‘행동’과 이에 수반되는 ‘하마르티아’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장애가 닥쳐도 이에 굴하지 않는 인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선한 목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의도하지 않은 실수나 결함 때문에 파멸하는 인간을 보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대전 예술의 전당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기념연극 오셀로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어느 이름 하나 가볍지 않다. 흑인 용병에서 최고의 장군이 된 오셀로. 그는 지금껏 완벽한 인생을 만들었다. 어느 흠하나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하지만 그 완벽함에 작은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흠을 지워야만 자신의 완벽함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 흠이 자신이 완벽하게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다. 그 아내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아내 자체도 완벽한 아내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 흠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견딜 것인가? 그는 갈등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한다. 자신의 인생은 완벽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다. 그래야 자신도 아내도 완벽해질 수 있다.


나이 많은 흑인 오셀로를 선택한 데스데모나. 오필리어와 줄리엣의 장점만을 섞어 놓은 완벽한 여인이다. 단 하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결혼한 잘못이 있다. 자신이 선택이 옳았음이 곧 증명되리라는 확신이 다른 여자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아고. 오셀로를 파멸시키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지휘관은 무능하다. 오셀로를 추앙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 그들이 진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오셀로는 결국 파멸했으니까.


공연은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다. 연출, 배우의 연기, 시각적 · 청각적 요소들, 공연장, 관객 등등. 모든 조건이 완벽히 준비된다고 좋은 공연이 될 수는 없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연극에서 캐릭터의 부재는 내용의 핵심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캐릭터가 될 수는 없다. 캐릭터의 핵심은 바로 ‘행동’이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맡은 배우들은 캐릭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대사를 반복하고, 어색한 표정만을 지어 보인다. 이아고만이 자신의 행동을 완수하고자 애쓸 뿐이다. 때문에 무대에 펼쳐진 여러 요소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공연을 보고 난 후 무엇을 긴 시간 동안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시간만이 흐르고 정리되지 않은 물의 이미지만이 남는다.


공연에서 일루전의 완성이 반드시 공연의 성공을 의미하는 지표는 아니다. 하지만 연극의 역사에서 일루전이 왜 중요한 핵심 요소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19세기까지 일루전은 행위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일루전은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무대와 객석 간의 의미 교환과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될 때 그것은 하나의 공연이라고 칭해지고, 관객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대에서 만들어진 의미와 전달된 신호가 엉망일 때 관객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때문에 남는 것은 공허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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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저작권자인 (사)대전민예총의 허락을 받아 동 기관이 2016년 발간한 "대전연극 비평과 리뷰 : 무대와의 불화"에서 평글 전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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